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대표팀]]의 시련 어린 도전 == 일본을 이기고 아시아 예선을 통과한[* 이 당시의 아시아는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축구팀이나 대회가 있기는 커녕 축구라는 스포츠가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은 열악한 시점이었는데, FIFA는 이러한 아시아의 축구 수준을 고려하지 못하고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과의 경쟁 없이 아시아 국가들끼리만 예선을 치르게 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타 대륙에 비해 수월하게 일본만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이 16강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0:9, 터키에 0:7로 참패하고 탈락하자 FIFA가 아시아들이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기에는 아시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지하고 1958 월드컵 지역예선부터는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들과 경쟁을 치러야 1958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주권 국가로서는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라는 영예를 안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했으나, 1차전에서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를 상대로 무려 9골을 내주며 0:9로 참패하고 만다. 하지만, 경기의 전후 사정을 자세하게 알아보면 '''사실 대한민국이 헝가리를 상대로 0:9로 경기를 끝낸 것은 예상 밖으로 엄청나게 선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당시 헝가리의 전력은 절대로 월드컵 본선 진출조차 요원한 현재의 평범한 유럽 중위권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헝가리 대표팀에는 당대 최고의 공격수 [[페렌츠 푸스카스]]를 필두로 [[산도르 코츠시스]], [[히데그쿠티 난도르]], [[졸탄 치보르]], [[요세프 보직]] 등 세계 정상급의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이른바 '''"[[매직 마자르]]"''' 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의, 현재까지도 역대 최고의 국가대표팀을 꼽으라면 두손가락에 들어갈 정도의 막강한 스쿼드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 전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축구 종주국이자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던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 조차도 대회 직전의 평가전에서 헝가리에게 1:7로 완패했고[* 이 패배는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다골 차 패배 기록으로 남아있다.], '''팀의 핵심멤버인 [[페렌츠 푸스카스]]가 부상으로 결장했음에도''' 8강전에서는 또 다른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을, 4강전에서는 디펜딩 챔피언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를 상대로 각각 4골씩 때려박으며 결승까지 올랐다. 즉 이 당시 헝가리 대표팀의 전력은 가히 세계 최강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으니, 애초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전력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으며 비교 자체를 불허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에 조인한 지 '''11개월'''밖에 안 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고,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도 급급한 상황이라 스포츠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런 상황에서 대표팀에 대한 지원이 넉넉할 리도 없었고, 되려 일본과의 최종예선에서는 원래 대한민국에서 한 경기, 일본에서 한 경기씩 치르게 되어 있는 걸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인들이 대한민국 땅을 밟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거부하는 바람에 홈 경기마저 치르지 못하게 되는 열악한 상황에 놓여버리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예선을 치르지 못하게 되자 일단 대외적으로는 대한민국의 날씨 문제를 이유로 3월에 일본에서 두 경기 모두 치르는 것처럼 처리했다. 그런데 도쿄 경기장 역시 연일 비와 눈이 섞여 내려 진흙탕 같은 운동장에서 경기를 했다.] 이러한 악재를 극복하고 기어이 일본을 꺾고서 본선에 올랐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것이다.[* 다행히 대한민국 대표팀이 일본을 꺾고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서 돌아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열렬한 환영 행사를 치러 주었다. 여담으로 대한민국에서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거부하며 뻐팅기자 당시 대한민국 국가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유형 감독이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며 "만약 우리가 일본에게 진다면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각서까지 쓸 정도로 강하게 어필해 어찌어찌 어웨이 경기라도 치를 수 있었다.] 거기에 당시 대한민국은 [[여권]] 발급과정이 더럽게 복잡해서 이것만으로도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행정력에서도 굉장히 미숙했는데, 단복조차 맞추지 못해 임원이 아는 집에서 외상으로 빌려 입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질조차 좋지 못해 금세 닳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본 외신 기자 중 한 명이 "당신들 나라에서는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라는 조롱이나 다름 없는 질문을 했다. 이때 헝가리전에서 전설적인 선방쇼를 선보인 골키퍼 [[홍덕영]]이 "우리나라는 [[6.25 전쟁|전쟁]]을 겪은 나라라서 물자를 절약하는 것을 애국하는 일로 여겨 바지를 짧게 입었다."고 재치있게 받아넘겼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은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조차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일단 [[미군]]의 [[수송기]]를 얻어타고 무작정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선이 발달해 있던 일본의 [[도쿄 국제공항]]으로 간 다음에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야 간신히 '''일본 도쿄-태국 방콕-인도 콜카타-파키스탄 카라치-이탈리아 로마-스위스 취리히'''로 이어지는,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방불케 하는 장거리 비행을 해야 했다.[* 노선이 저렇게 괴랄한 이유는 간단하다. 1950년대에는 기술 부족으로 민항기들의 항속거리가 그리 길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적성국이었던 [[중국]]과 [[소련]]의 영공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유럽을 가려면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크게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카라치]]의 [[진나 국제공항]]은 당시 아시아-유럽 항로의 거점으로 각광받았으나, [[냉전]]이 종료되어 구공산권의 영공이 활짝 열리고 [[파키스탄]]의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고생담이 [[1948 런던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던 대한민국 선수단에게도 있다. 다만 이때는 타 종목 선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일찍 출발한 편이었다.] 그나마도 티켓이 모자라서 날짜조차 못 맞출 뻔했는데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왔던 영국인 신혼부부가 이들의 사연을 접하고는 월드컵인데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며 딱하게 여겨 자신들의 비행기 티켓을 양보한 덕에 1진이 먼저 출발해서 경기 날짜만 간신히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2진은 뒤늦게 구한 [[에어 프랑스]]의 항공편을 통해 스위스에 도착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대표팀은 다른 팀들이 전부 다 개막 한 달 전부터 모여서 현지 적응 훈련하고 뭐하고 할 때는 물론 월드컵이 개막한 이후에도 스위스에 도착하지 못했고, 그렇게 대한민국 대표팀이 스위스에 도착한 것은 '''경기 이틀 전 22시'''였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스위스에 도착해서 숙소를 쉽게 찾아갈 리도 없었고, 그렇게 간신히 숙소를 찾아가고 나서도 경기 하루 전날까지 선수들이 직접 유니폼 바느질을 한다거나 축구화 손질을 한다거나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대한민국 대표팀은 시차적응이나 컨디션 관리는 고사하고 온갖 고생만 잔뜩 한 끝에, 거의 '''유니폼만 갈아입는 수준으로 결전의 준비를 마치고 바로 세계 최강 헝가리를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전반 초반 20여 분까지는 헝가리의 공격을 비교적 잘 막아냈으며, 결정적 득점 찬스까지 맞았을 정도로 헝가리를 몰아붙였다. 이 때문에 초반에 다소 고전한 헝가리 선수들 사이에서 분란이 있었을 정도. 그러나 헝가리는 대한민국 선수들이 점차 체력의 한계로 경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최선을 다해 대한민국의 골문을 괴롭혔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골문을 지켰던 [[홍덕영]] 골키퍼는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 공세를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수 차례나 선방해내는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 경기에서 헝가리 선수들이 어찌나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는지, [[홍덕영]] 골키퍼는 훗날 '''"슈팅 수를 30개 이후로는 아예 세 보지도 못했고[* 이 증언이 와전되어 헝가리전 유효 슈팅 100개설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경기에서 100개의 슈팅이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어림잡아 30개 이상에서 40개 이하나 중간 정도로 보인다.], 특히 [[페렌츠 푸스카스|푸스카스]]의 슛은 정말 강해서 위잉 소리가 날 정도였으며,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홍덕영]]은 이러한 맹활약과 축구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최초의 7인에 헌액되었다. 이후 한일 월드컵 유치위원단으로 활동하던 도중 수십 년 만에 푸스카스와 재회했다.] 게다가 어찌나 힘들었던지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공을 잡으면 고의로 밖으로 차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공을 밖으로 차낸 경우 다시 가져올 때까지 경기를 진행하지 않았던 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맹활약에 감명받은 관중들 중 일부는 경기가 끝난 뒤 그에게 사인 요청까지 했을 정도였다. 당시 해외 언론은 경기 전만 해도 [[양민학살|헝가리의 20:0 대승 또는 그 이상]]을 예상한 곳도 많았다. 심지어 당시 기록 영상만 봐도 외국 기자들이 경기 도중 대놓고 드러누워 잘 정도였다. '취재할 거 있어? 아주 학살당하겠지. 깨면 취재나 하자고.'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되려 이들은 경기 종료 후 '''"겨우 9:0으로 이겼어?"'''라며 크게 놀랐다고 한다.[* 1998년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대한민국이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에 [[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네덜란드전|0:5로 대패]]했을 당시, 대한민국의 골키퍼였던 [[김병지]]만은 외신의 찬사를 받았던 것과 비슷하다. 그 경기 역시 김병지의 선방이 없었다면 5골보다 더 큰 점수차가 나올 여지가 충분했던 경기였던 까닭이다. 하물며 이때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상황이 1998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이 당시는 발전되지 않은 축구 전술의 특성상, 미드필더와 수비수에 비해 공격수가 상당히 많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지금보다 다득점이 굉장히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월드컵 초창기의 기록을 보면 골이 많이 터진 경기가 많았으며 친선 A매치 기록을 보면 수준 차이가 나는 경기에서 지금으로서는 말이 안 될 정도로 골이 많이 나왔다.] 실제로 당시를 회고한 축구 원로들은 후반전에 다리가 풀리고 쥐가 나는 와중에도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90분을 뛰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은 딱 11명에 맞춰 1진만 온 데다가 당시엔 골키퍼를 제외하면 선수교체 규정조차 없어서 쥐가 나거나 탈진해서 쓰러진 4명이 나간 뒤에는 7명만 뛰어야 했다. 그 때문에 당시 승장이자 [[헝가리]] 대표팀을 지휘한 구스타프 세베슈 감독 또한 대한민국 선수들의 이런 눈물겨운 투혼을 보고 '''"대한민국 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 쓰러져도 계속 일어나 뛰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렇듯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헝가리 대표팀의 경기를 관전하러 왔던 전세계의 축구 팬들에게 대한민국은 그저 구색이나 맞추기 위해 출전한 [[들러리]]로 평가받던 초반의 시선을 떨쳐내고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월드컵 본선까지 올라온 위대한 불굴의 팀으로 각인되었다. 실제로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유럽 방송국의 해설자들 또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6.25 전쟁|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라의 선수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분들께서 이들에게 응원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된 유럽의 축구팬들은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의 숙소에 들이닥쳐서 점퍼, 청바지, 소시지, 통조림, 현금, 손목시계 등 각자 갖고 있는 물건들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돌아갔다. 이런 유럽인들의 대인배적인 사랑 앞에 당시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쉽게 말해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그들이 거둔 성적과 상관없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참가한 [[난민 올림픽 선수단|난민 대표팀]] 선수들에게 전세계가 표한 것과 같은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헝가리전에서의 대패로 분위기도 가라앉은데다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진을 다 뺀 대한민국은 뒤늦게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한 2진 선수들을 주축으로[* 헝가리전에서 뛰었던 1진 선수들이 체력 고갈로 기진맥진한 탓도 있지만, "우리가 이런 세계적인 대회에 출전해 볼 기회는 더는 없을 테니 차라리 대표팀 전원에게 한 번쯤 경기에 뛸 수 있는 기회가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2진 선수들에게 출전 기회를 양보한 것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이 다시금 월드컵 무대를 밟기까지는 장장 32년이 걸렸다.] 이후 2차전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터키]]와의 경기를 치렀으나 역시 매우 무기력한 경기를 펼쳤고, 이 경기마저 결국 0:7로 대패하고 말았다. 터키전을 끝으로 대회 일정을 모두 마친 대한민국 선수단은 귀국하는 과정에서도 해프닝을 겪었는데, 바로 월드컵 경기 수익의 일정액을 출전국에 분배하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스위스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터키와의 경기가 끝난 뒤 대한민국 선수단이 묵었던 호텔로 '경기배당금 8,400달러를 받아가라'고 통보했으나, 대한민국 선수단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까지 온 과정도 매우 험난했기에 귀국이라도 서두르기 위해 이미 스위스를 떠난 뒤였다.[* 이 배당금은 결국 스위스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는데, 이후 바로 다음 월드컵에서 [[대한축구협회]] 직원이 월드컵 예선 참가 신청서를 분실해 버리는 바람에 어이없게 월드컵 예선에도 못 나가게 되어 FIFA에 납부해야 했던 벌금을 바로 이 스위스에 남아 있던 배당금으로 충당했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김용식(축구인)|김용식]] 감독[* 김용식 또한 당시 선수로 활약한 골키퍼 [[홍덕영]]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최초의 7인에 헌액되었다.]은 조 추첨 결과만 보고도 이미 대한민국에게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6.25 전쟁|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며 간곡하게 호소했고 선수들 역시 이러한 호소에 전의를 다지고 경기에 임했지만, 그 한 골을 넣기에는 세계와의 격차가 너무나도 컸고, 대진운도 너무 없었으며, 열악한 조건 탓에 스위스에 너무 늦게 도착해 경기를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없이 끝내 그 소박한 목표조차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악전고투를 겪은 대한민국이 처참한 성적을 거두고 돌아가자 유럽 강호들에게서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은 실력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이런 수준 낮은 국가들이 월드컵에 나와 대회의 격을 떨어뜨려서야 되겠느냐?"'''라는 비판 의견이 크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월드컵의 창시자인 [[쥘 리메]] FIFA 회장은 '''"월드컵은 강자만의 대회가 아니다. 대한민국 같은 약체라도 그 대륙에서 예선을 거쳐 올라온 만큼, 나올 값어치는 있다. 또한 지금은 대한민국이 무너졌다고 해도, [[히딩크호|나중]]에는 [[신태용호/2018 FIFA 월드컵 러시아/독일전|어떻게]] 될지 [[벤투호/2022 FIFA 월드컵 카타르/포르투갈전|모르는 일]]이다."'''라며 대한민국을 변호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며 점차 유럽, 남미 위주의 축구판에도 균열이 일기 시작하는데 결국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카타르 월드컵]] 32강 조별리그에서 이변이 여러 차례 발생한 끝에 16강에 아시아 팀이 셋, 아프리카 팀이 둘이나 올라갔고, 비록 아시아 팀은 16강에서 전멸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모로코]]가 16강에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을, 8강에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을 잇달아 물리치고 준결승(4강)에 진출해 아프리카 팀이 사상 최초로 '''4강'''에 진출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게다가 이 월드컵 우승팀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였으며, 딱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C조/아르헨티나 vs 사우디아라비아|한 번]]만 빼고 다 이겼는데 그 아르헨티나를 이긴 팀은 바로 아시아 팀 중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사우디아라비아]]'''였다. 또,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그로부터 8년 전]]에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여 승승장구하다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직전 월드컵]]에서 [[신태용호/2018 FIFA 월드컵 러시아/독일전|아시아 팀(대한민국)에게 져서]] 월드컵 도전 역사상 최초로 1라운드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22위)했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은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E조/독일 vs 일본|'''또다시''' 아시아 팀(일본)에게 져서]] 2연속으로 1라운드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17위)하는 수모를 겪었다. 물론 독일은 지난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당시 8강 조별리그에서 탈락(6등)했던 적이 있기는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